고백하건대, 5년 9개월간 살았던 이사오기 전 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집은 위치는 완벽히 편리했지만 건물 자체가 연식에 비해 더 낡았고, 전에 살던 사람들이 관리를 형편없이 한 바람에 (세입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뭔가를 뜯거나 고쳐야 했으며, 수납공간이 부족한데다가 어린이 둘을 포함하는 네명이 살기에 좁았다. (특히 미취학 어린이는 정말 짐이 많다.) 그 집에서 가장 불편했던 부엌은 원룸 사이즈였는데 요리도 아닌 생존음식을 차려내는 데도 몇번을 치우고 닦고 썰고를 반복하다 결국 ‘아… 좁아…’라고 매일 탄식하게 만들었다.
정리를 하지 않으면 잠이 안오는 내가 정리를 하다하다 포기하고(그때는 애들이 어려서 더더욱 시간이 없었지…) 몇해를 살았다. 내 기준으로 늘 난장판이었기에 집에 들어가도 내집이 주는 편안함이 없었고, 아무도 집에 초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정리안된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집에서 5년을 살았을 때 깊이 깨달았다. ‘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어.’ 매일 청소를 하는데 너저분했고 티가 안났으며 나의 노력을 갈아넣어도 나아지지 않는 삶의 환경이 나를 끝도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완벽주의 성향의 집순이를 정리 안된 집에 5년 넣으면 마음의 병이 생긴다는 걸 경험했다.(물론 모든 원인이 집 때문은 아님) 그 후 9개월을 더 꾸역꾸역 참으며, 가족의 물심양면 도움을 받으며 살았고 드디어 탈출했다.
이사하며 온갖 것을 버리고 대부분의 것을 새로 구축했고(구축이라는 표현이 적절), 정리에 몰두했다. 3주를 꼬박 집에만 오면 누워 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종일 정리와 청소를 했다. (같이 사는 사람 미안해…)
마음의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이석증이 찾아오고;;;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살면서 정리한다는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 그래도 이제 누워 쉬어도 맘이 편하고 누굴 초대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 집이 됐다.
이번에 깨달은 건,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건 체력이라는 것. 이사 과정에서 무수한 비닐을 사용하고 분리수거를 했고 물티슈를 사용하게 됐다. (우리집 물티슈 안산지 5년 넘음) 근데 몸이 지치면 분리수거가 아니라 다 때려 박아 버리고, 물티슈를 더욱 많이 썼다. 당근마켓에 나눔하려던 물건들도 순간 꼴보기 싫어지며 내다 버렸다. 조금만 기운이 있었어도 지구에 쓰레기를 보태진 않았을텐데… 하는 죄책감을 한 달 가까이 느껴야했다.
결론 : 다들 이제 운동하세요. 그럴 나이입니다.
이사 후기
자가격리 6일차
(아니 1-5일차도 없는데 난데없는 6일차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6일차여서 제목을 그렇게 붙여봤다.)
인류는 COVID-19라는 녀석을 만나 전례 없는 전 세계적 고생을 하고 있다. 아무리 지구인이 모두 위험하다해도 마스크 잘 쓰고 다니면 무탈할 줄 알았는데 졸지에 자가격리자가 된 썰을 풀어보자.
D-day
어린이의 학교에서 오전10:17에 전화가 왔다. 난 10:00에 출근했는데. 이런 시각의 전화는 대체로 불길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어린이 학급에서 확진자가 발생해 모두 귀가조치+코로나 검사를 해야한단다. 하루종일 회의가 잡혀있던 날이라 급히 동거인에게 전화해 귀가시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6시반 무렵. 평온하게 저녁밥 준비를 하려는데 카톡이 하나 왔다. 역학조사 결과 어린이는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즉시 자가격리에 들어가며, 보호자 1인도 함께 자가격리라고. (아 뭐라고 이것드라????)
저녁밥이고 뭐고 영혼이 나간채로 덩그러니 30분을 앉아있었다. 영혼은 나갔지만 극j형 인간답게 당장 일주일간의 일정을 머리속에서 다 조율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D+1
보건소에서 오전10시경 전화가 왔다.
자가격리 통지서와 키트가 집으로 비대면 배송될거고, 담당 공무원이 배정되면 연락이 올거고 지침을 다시 알려줄거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아무 연락도 안온다. 나보다 며칠 먼저 자가격리 체험을 하고 있는 친구 얘기에 따르면 앱을 깔고 매일 체온 측정을 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데 그냥 방치되고 있는 우리.
보건소에 오후5시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한시간 뒤 퇴근할테니.
우리구에 자가격리자가 많아져 처리가 늦어지고 있고 연휴라 다음주 화요일에 해준다고… 아니 지금 자가격리 시킨게 우리를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런거 아냐? 감시 안해? 국민을 겁나 신뢰하는구만?
D+5(6일차,오늘)
키트 왔고(키트래봐야 진짜 뭐 별거 없음) 앱 깔라는 문자도 왔다. 생각보다 시시해서 실망.
우리는 착실하게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나야 워낙 집에 있는게 좋으니 괜찮은데 어린이는 그네가 너무 타고 싶다고… 그리고 동거 어린이는 등교를 위해 이틀에 한 번씩 코로나19 pcr 검사를 받아야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그래도 어린이 입장에서 감금보단 코찔림이 낫지…
직장도 리모트워크 가능한 직장이라 괜찮은데, 모니터와 키보드가 너무 불편해 죽을맛이다. 모니터 사고 싶고 키보드 사고 싶은데 매일 참는 중. 왜냐면 나는 비싼거 사고 싶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자가격리 당해도 괜찮을 줄 알고는 있었는데 예상보다 더 괜찮아서 나 스스로도 ‘이 정도로 집순이었다니!’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배달시스템에 박수를 보낸다. 안오는게 없어 진짜…
제주살이 스물여덟째날: 반짝반짝했던 우리의 한달살이
마지막 온전한 하루.
제주를 떠나는 내일은 아침나절 내내 한달 동안 살았던 집을 정리하는 날일테니 아마도 정신이 없겠지. 그렇다면 제주에서의 마지막 온전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못한 것들을 몰아서 해볼까? 하지만 좀 더 차분하게 그간 우리가 했던 것 중 또 하고 싶었던 것을을 떠올려보며 한 번 더 가볼 곳을 두개 정도 고르면 어떨까? 이 정도로만 고민하고 아침밥 먹는 애들과 얘기를 나눴다. 너희는 어떤게 좋겠어?
"좋았던 걸 또 하는게 좋겠어!"
그렇다면 우리가 좋았던 것은 뭐가 있을까. 박물관도 갔었고 바다에도 갔고, 절물휴양림, 만장굴, 선흘분교, 오름도 갔었는데 각자 좋았던 곳을 두개씩 고르기로 했다. 첫째는 오름과 절물을 골랐고, 둘째는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나는 바다와 선흘분교를 골랐다. 짝꿍은 바다와 절물을 골랐다. 그래서 투표결과는 바다와 절물휴양림. 바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김녕성세기 해변. 어디부터 가야하나 고민하는데 첫째가 절물부터 가자고 한다. 바다는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복잡하니까. 오... 똘똘한데? ㅋㅋㅋ
간식을 싸가지고 절물로 향했다. 간식은 냉장고에 남아있던 오메기떡 세알을 챙기고, 달걀 세알을 삶아서 챙기고. 남은 과자들과 귤들을 챙겼다. 그런데 오후에 갈 바다 짐까지 싸야하니 너무 바빴다.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결국 11시 출발. 아이들과 움직이면 아무리 서둘러도 11시에 집을 나서게 되는구나. ㅠㅠ
지난번 절물에 왔을때는 서늘해서 추울 정도였는데 오늘은 습도가 높고 더웠다. 숲 한가운데 있으면 그나마 바람이 불때 시원한 감이 있는데 햇볕이 쬐는 길은 너무 더웠다. 온몸이 끈끈해지는 기분. 숲은 상쾌하려고 오는건데 아우... 제주의 여름을 마지막 날에서야 제대로 알게 됐다. 역시 가을에 와야되나봐... 그래도 절물의 삼나무는 아름다웠고 숲길은 포근했다. 두 번째 오는건 그것대로 맛이 있어서 아이들은 '지난 번엔~'하며 첫번째 방문을 기억했고 소소하게 달라진 것과 여전히 같은 것들을 말하느라 바빴다. 지난번에 너무 추워서 못했던 족욕장에 가서 발도 담갔다. 얼음장같이 찼지만 이래서 발을 담그는구나... 싶게 시원했다. 여름은 이런데서 보내는거지. 중간중간 나오는 쉼터에서 소소하게 간식 먹고 고리던지기도 하고 놀고 알차게 숲을 즐겼다.
정신없이 놀다보니 한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일단 가장 가까운 눈에 보이는 밥집에 들어가 밥을 먹으며 이후 동선을 짜본다. 원래 김녕에 가려고 했으나... 절물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승마체험' 글씨를 보고 아빠가 오면 말타러 가기로 한 걸 기억해낸 남매들로 인해 계획변경. 그럼 내친김에 말도 타고 카약도 타자!
찾아보니 애들이 좋아할 승마체험장이 있었다. 옛날 승마장들이 주로 말을 타고 승마를 배우는 것이었다면, 여긴 먹이주기 체험도 하고 카페도 운영하고 부모와 아이가 시원하게 말을 한 번 타보는 경험을 하는 곳. 이런게 장사지... 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비싼 값에 사진을 판단 글을 블로그에서 봤는데 '막상 보면 안 살 수가 없어요'란 말을 보고 불길했다. 뭔지 너무 알겠는 그런 느낌... 사진 결과물은 역시... 이렇게 좋은 렌즈로 이렇게 예쁘게 애들을 찍어줬는데 안살 부모가 어딨어! 흑흑... 샀다. 전혀 강매하지 않았고 아무런 압박도 하지 않았고 단지 사진만 보여줬는데 그게 최고의 상술이었으며 알면서 샀다. 우리 추억을 돈주고 사자. 의미 있어! ㅋㅋㅋ
마지막 여행지는 하도리. 여긴 우리 부부가 아주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철새도래지가 옆에 있고 하도리는 물이 빠지면 정말 가도가도 바닷물이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곳이다. 드디어 카약 탑승! 예상은 했지만 애 둘을 데리고 카약을 타는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배 하나에 탈 수 없어 두개를 묶었더니 더더욱 ㅋㅋㅋㅋ) 속도감이 나서 쭉쭉 가야 재밌을텐데 마침 바람이 세서 어른 둘이(사실 내가 0.5인분의 힘...) 바람을 이기고 가려니 팔과 어깨가 너무 아팠다. 30분 탔기에 망정이지 1시간 탔으면 쓰러졌을 듯 ㅋㅋㅋ
카약에서 내려 마지막 바다놀이를 했다. 나는 바닷물이 찰랑한 모래에 앉아 제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고, 첫째는 아빠랑 돌 틈에서 뭘 잡느라 바빴고, 둘째는 물놀이 모래놀이를 했다. 날이 더워 6시 넘어서도 바닷가엔 사람이 많았고 우리도 그렇게 거의 7시가 되도록 바다에서 놀았다. 이날 바다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그냥 그렇게 계속 앉아있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함덕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집과 미리 사두었는데 비가 너무 오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날에... 스파클러 200개를 샀더니 아주 원없이 신나게 반짝거리고 놀았다. 반짝반짝. 우리의 한달도 그렇게 반짝거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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